[건축여행]
수원 부국원
경기 수원시 팔달구 향교로 130
글 _ 김예슬 (작가)
‘여행지를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대단한 처방을 내려줄 것처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몇가지 질문을 던지긴 하지만, 당일치기 여행이라면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수원 화성이다. 역사적인 건축물이니 어르신들을 모시고 가기에 품격이 있고, 성곽을 따라 자연이 안겨 있으니 아이들과 함께 가기에도 적격이다. 짧은 동선 안에 미술관과 카페, 음식점이 모여 있어 친구나 연인과 걸어 다니기에도 합격이다. 밤낮, 계절 구분 없이 언제 가도 아름다워서 이만한 곳이 없다.
조선시대에 축조된 성 안밖으로 근현대건축물도 여럿 남아있다. 삼일중학교 아담스 기념관, 구수원문화원, 구 수원시청사 등등. 그 중에서도 부국원은 100년동안 용도를 수없이 바꿔가며 살아남아 도시가 거쳐온 역사를 온몸으로 증언한다.
건물이 지어진 건 1923년이다. 부국원은 종자, 종묘, 비료, 농기구를 판매하는 일본인 회사였는데 본사를 현재 위치에 신축했다. 지금이야 아담해 보이는 건물 한 채 뿐이지만, 1937년 부국원 조감도를 참고하면 부지가 꽤 컸음을 알 수 있다. 나무들이 담장을 빙 둘러싸고 있는 넓은 터에 온실, 창고, 부속건물들이 놓여있다. 1930년대 조선인 종묘 회사 만종원이 설립되기 전까지 이 회사는 1910년 후반부터 종자와 종묘를 독점 공급, 판매하던 곳이었다. 식민지가 되어버린 땅에서 자행된 농업 수탈은 아주 작은 씨앗을 통제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나라를 부유하게 한다’는 야망 가득한 간판을 내걸고 말이다.
1937년 부국원 조감도 사진 속에서 ‘온실’이 눈에 들어왔다. 사전적 정의로 “광선, 온도, 습도 따위를 조절하여 각종 식물의 재배를 자유롭게 하는 구조물”. 계절과 상관 없이 안온한 풍경이 유지되는 공간이기에 때로는 예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소설가 지하련 작품 <체향초(1941)>에서 나오는 집에 딸린 온실은 일상과 구분된 공간이다. 평화로운 온실 안에서는 작은 긴장감도 큰 증폭으로 느껴지게 한다. <온실일우(1958)>를 포함 수 많은 온실 풍경을 그림으로 남긴 화가 이병규 작품 속에서 온실은 녹음만이 가득하다. 이따금씩 등장하는 인물 한두 명도 녹색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현실에서 온실 속에 이런 평화로움은 없었다. ‘계절과 날씨와 상관 없다’는 온실에 특성은 ‘효율을 극대화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1930년대 수원 일대에 조선인 회사가 생겼다고 해서 부국원의 기세가 꺾이진 않았다. 1940년대 일본 침략전쟁에서 물자 동원에도 참여했다.
해방 이후 부국원 건물은 수원법원 및 검찰 청사, 교육청, 민주공화당 경기도당 당사, 내과 의원, 인쇄소로 사용되었다. 2010년 이후 철거될 위기가 있었으나 시민들의 요구가 있었고, 수원시가 매입했다. 복원 공사를 거쳐 지금은 근대문화공간으로 사용 중이다.
부국원을 추천하고 싶은 건 역사적 의미 때문만은 아니다. 내부 콘텐츠도 다채롭기 때문이다. 건물은 총 2층이다. 크진 않아도 이 안에서 매번 전시를 기획하여 열고,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시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인 만큼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 작은 서가도 마련 되어있다. 건물 요소마다 설명을 덧붙여 부국원이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문을 열고 1층에 들어서자마자 마루바닥에 설치된 유리 바닥을 마주하게 된다. 그 안에는 자잘한 타일이 깔려 있는데 ‘구 부국원 원형 바닥’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설립 당시보다 현재 바닥이 30센티 더 높아졌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커다란 철문이 있다. 내부를 뜯어내며 벽체를 확인할 때 발견된 문인데 원래는 부속건물 통로 였다고 한다. 문 위에 상표가 붙어 있는게 재미있다. 을지로에 있던 ‘주상회’라는 가게에서 제작했다는 표식이다.
오래된 건물일 수록 건물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방문자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게 중요하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불편함이나 이상함도 의미 있게 느껴진다. 전체를 이루는 아주 작은 요소, 예를 들면 창문이나 손잡이 같이 아주 사소한 부분을 들여다볼 때 건물 안에 담겨진 이야기가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다. 건축여행에 있어서 만큼은 새것처럼 말끔하게 수선된 장소보다는 시간 흔적이 묻어 있는 곳이 좋다. 그걸 간직하고 잘 소개해주는 곳이면 더욱 반갑다.
수원 부국원을 들여다보다가 서울 을지로로 연결 되듯 뜻밖의 경로를 발견하는 것도 건축여행이 주는 즐거움이다. 부국원 건물 모서리를 더욱 매끈하게 보이게 하는 ㄱ자 타일이 백범 김구 사저로 사용된 경교장 타일과 같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우리에게 ‘그냥 타일’은 없다. 서울 삼성병원 안에 있는 경교장에 가신다면 외벽 모서리가 수원 부국원 타일처럼 ㄱ자형인지 꼭 확인해보시기를!
부국원을 나와 팔달문을 지나 화성행궁 앞으로 걸어오며, 수원의 100년전으로부터 천천히 빠져 나온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부국원은 광복 후 법원이 되기도, 병원이 되기도 했다. 수원 화성은 전쟁을 겪으며 폐허가 되기도 했지만,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렇게 도착한 2024년 11월. 화서공원 서북각루 단단한 성벽 옆으로 억새가 물결친다. 건물에서 사소한 것을 들여다보던 두 눈은 비로소 지금, 바로, 이곳에 닿는다. 한번도 멈춘 적 없는 시간 속에서도 단 하루 뿐인 의미 있는 오늘이다.
김예슬 작가 : 휴가를 내지 않고도 주말을 여행자처럼 쓰기 위해 건축 여행을 시작했다. 2015년부터 오래된 건축물을 찾아 전국을 여행했고 1,000곳이 넘는 건물을 기록했다. 대학에서는 국문학과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저서로는 서울의 근현대의 시간을 간직한 54곳의 건축 여행지를 담은 "서울 건축 여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