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여행]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
경기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193
글 _ 김예슬 (작가)
장욱진은 충청남도 연기군 출신이다. 1990년 작고할 때까지 거주한 집은 용인 ‘장욱진 가옥’으로 운영 중이다. 그렇다면 양주와는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일까? 장욱진은 1964년 47세때 작업실 겸 집을 짓고 12년간 거주한다. 주소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삼패리. 현재 주소로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덕소)이다. 화가는 가족과 떨어져 그림에만 몰두했다. 집, 가족, 나무, 달, 새… ‘나는 누구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다양한 실험을 한 이 ‘덕소 시기’는 장욱진 화풍을 구축 시킨 기간으로 평가받는다. 화가 이 시간 캔버스 앞에서 한 고뇌는 눈 내린 덕소 풍경을 그린 추상화 <덕소풍경(1963)>, 어두운 바탕에 거친 붓질과 질감으로 완성시킨 작품 <무제(1964)> 등 ‘장욱진’ 하면 떠오르는 동화적인 후기 작품과는 또 다른 개성이 녹아 든 작품을 남겼다.
초기에 비해 이 시기 작품에 가족이 많이 등장하는데, 아마도 가족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 때문일 것이라 해석한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직도 사임했기 때문에 생계를 부인이 책임져야 했다. 남편과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가장이 된 화가의 아내, 이순경은 무엇이든 해야 했기 떄문이다. 이순경 대표는 2년 전 별세하셨다. 그럼에도 ‘덕소 시기’에 차린 서점은 여전히 서울 혜화동에 건재하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으로 꼽히는 동양서림이다. 화가 장욱진이 ‘나는 누구인지’ 고민하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 때, 동양서림 창업자 이순경 역시 새로운 정체성을 맞이한 게 흥미롭다. 삶은 이토록 다면적이라 아름답다.
장욱진 미술관은 양주 장흥에 위치해 있다. 차로 이동해야 편한 산골짜기이지만 자연을 찾아 작업실을 옮기고, 또 옮겨 다녔던 화가가 살아 생전에 보셨더라면 꽤 만족스러워 했을 것이다. 입장권을 끊고 매표소를 지나 들어가면 넓은 조각공원이 나온다. 알록달록한 조각 작품이 나무 사이에 놓여있고, 저 멀리 언덕 위로 하얀 건물이 보인다. 화가 장욱진이 스케치해 놓은 듯 단순한 색과 형태가 인상적이다. 조각공원과 하얀 건물 사이로 개천이 흐르고 그 사이를 건너려면 둥근 초승달 같은 구름다리를 건너야 한다. 장난감 같은 조각상과 자연 때문에 아이들이 구름다리를 미처 건너지 못한 채 언덕을 뛰어다니고, 물가 가까이 가서 구경하기 바쁘다.
주변이 산이고 숲이라 새들이 터의 주인인 것처럼 적극적으로 말을 건다. 까치를 분신처럼 자주 그렸던 장욱진이 혹시 이 새들 중에 환생해 있을 것만 같다. 봄에는 벚꽃이 피고, 여름에는 세상 모든 푸른 색이 주변을 가득 덮치고, 가을에는 단풍이 들고, 겨울에는 눈 내린 풍경 사이사이를 아이들과 새들이 휘젓고 다닌다. 그 틈에서 단순한 선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하얀 미술관. 이 풍경 자체가 마치 장욱진 그림과 닮아 있어서 캔버스 액자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장욱진 미술관 건물은 실제로 화가의 작품 <호작도> 속 호랑이를 모티브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앉아 있는 호랑이를 선으로 그려 놓은 듯 길고 조형적인 모습이다. 건물은 폴리카보네이트 소재로 지어졌다.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질 지 모르겠지만 재래시장 지붕, 안경, 전기제품 등 일상 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소재다. 비싸고 구하기 힘든 재료보다 가볍고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소재가 ‘장욱진’이란 이름과 잘 어울린다. 투명한 소재를 지붕과 벽면 구분 없이 전체를 뒤덮어 최대한 형태적 아름다움만 남겼다.
멀리서 보면 새하얗게 보이지만 햇빛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색을 낸다. 건물 역시 시점에 따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장욱진 작품 속 호랑이를 모티브로 했다고 하지만 방향에 따라 화가가 자주 그리던 집 형태 같기도 하고, 미술관을 둘러 싸고 있는 산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건물 곳곳에 큰 창을 낸 덕분에 자연 풍경이 내부로 깊이 들어온다. 관람객은 매표소부터 이어져온 산책이 끊기지 않고 작품 앞까지 이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내부에서 전시된 작품 사이마다 놓여진 큰 창은 자연을 곁에 두고 아이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하려고 했던 화가 장욱진의 시선을 사색하게 돕는다. 건물을 설계한 사무소는 최-페레이라 건축이다. 공동대표이자 부부건축가인 최성희, 로랑 페레이라는 이 건물로 2014년 김수근 건축상을 수상했다. 김수근 건축상이 시작된 이래로 외국인이 수상한 건 처음이었다고 한다.
장욱진 미술관에 쓰인 유일한 색은 흰색이다. ‘희다’라고 하면 숭고, 청결, 청순, 순수 같은 이미지가 있다. 한편으로는 모든 빛을 합쳤을 때 나오는 색이기도 하다. 밝다는 건 모든 색을 섞었을 때 나오는 검정색처럼 모든 것을 품지만 결코 자신을 않는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미술관 내부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창문으로 산이 보여서 인증샷을 찍는 장소로도 유명한데, 계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깔끔하면서도 복잡한 형태가 마치 ‘흰색’이 갖고 있는 중의적 의미처럼 느껴진다.
덕소 시절, 장욱진은 ‘나다움’에 대해 고민했다. 형태를 뭉개고 세워보며 내가 무엇을 가장 잘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때 가장 편한 지 찾아냈다. 화가가 자신을 표현한 때 가장 많이 한 말이 “나는 심플하다” 였다고 한다. 이 말처럼 화가는 생의 끝으로 갈 수록 점점 더 단순하면서도 균형감을 갖춘 그림을 그려냈다. 많은 사람들이 화가 장욱진과 그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건 아닐까. 시간이 흐른다는 건 늙거나 낡아지는 게 아니라 나다움이 명료해지고 깊어 지는 것임을 작품으로 증명했으니 말이다. ‘단순하고, 나답게 살기.’ 흔한 자기개발서 내용 같지만 화가의 삶과 작품이 그것이 시간을 거스르는 진리임을 말해준다. 따뜻한 붓 터치 사이사이에 담겨있는 장욱진의 혼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듯 하다.
하루 아침에 아침 공기가 차가워졌다. 가을. 유난히 더위가 길었던 터라 그토록 기다렸던 계절인데 막상 10월이 되고 나니 두 장 밖에 안 남은 달력이 성적표인 것 마냥 초라해지는 듯 하다. 1월 새해에 어떤 다짐을 했는지 뒤져본다. 운동 꾸준히 하기, 독서하기, 가족과 시간 많이 보내기….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가 그리 바빴는지 지키지 못한 것도 많다. 행복해서 웃었던 날도 있지만, 걱정과 슬픔으로 잠 못 이룬 밤도 많았다. 남은 두 달, 어떻게 살면 될까. 양주 시립 장욱진 미술관에서 가을을 흠뻑 느끼며 산책을 하다 보면 나다운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추천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 바로 옆에 양주시립 민복진 미술관과 권율장군묘가 있으니 함께 둘러보시길!
김예슬 작가 : 휴가를 내지 않고도 주말을 여행자처럼 쓰기 위해 건축 여행을 시작했다. 2015년부터 오래된 건축물을 찾아 전국을 여행했고 1,000곳이 넘는 건물을 기록했다. 대학에서는 국문학과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저서로는 서울의 근현대의 시간을 간직한 54곳의 건축 여행지를 담은 "서울 건축 여행"이 있다.